발칸의 민족주의- 세르비아가 발칸 반도를 통일하지 못한 이유
Nationalism of the Balkan ― Reasons why Serbia could not Unite the Balkan Peninsu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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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프롤로그
지금까지 발칸에 대해 글을 쓴 것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예전에 수능 세계지리 교재를 집필하면서 발칸 반도에 대해 쓴 것으로, 유고슬라비아의 근현대사를 소개한 짧은 글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올 여름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뒤, ‘민족과 국민의 수업’의 일환으로 『발칸유럽 민족 문제의 이해』라는 책을 읽고 쓴 서평이다. 이 책은 발칸의 역사를 민족주의를 가지고 분석한 책으로 해당 지역의 전공자가 심도 있게 집필한 책이었다. 다만 이 책은 1918년의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설립까지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글에서 다루는 그 이후의 역사는 다른 자료를 통해 보충했다. 지금부터 쓰고자 하는 글은 미리 써 둔 두 글을 종합하여 정리하고, 보충한 것이다. 단, 여기서 발칸 반도 전체를 다루지는 않고, 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 중에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일원이었던 지역에 한정해서 다루겠다. 사실 이 글은 발칸 반도로 여행을 떠날 친구를 위해 쓴 글이었으나, 친구가 여행을 다 마치고서야 완성하고야 말았다.
1. 서론
발칸의 나라들은 각기 상이한 정체성을 바탕으로 발전해 왔다. ‘민족(nation)’에 대해 역사학자들, 사회과학자들 사이에 다양한 이론(異論)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민족이라는 정체성은 근대의 산물일 뿐이라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예컨대 사르데냐-피에몬테가 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이전까지 이탈리아 사람이라는 의식은 없었고 ‘나는 베네치아 사람이오, 당신은 토리노 사람이오.’와 같은 의식만 있었을 것이다. 유럽의 변두리, 발칸의 슬라브 족들도 이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슬라브족들이 여기에 태초부터 살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2. 본론
2.1. 발칸의 전근대사
먼저 발칸의 여러 나라 중 북서쪽에 치우쳐져 있는 슬로베니아(Slovenia/Slovenija)에 대해 살펴보자. 이웃한 슬로바키아와 이름도 비슷한 이 작은 나라는 인구가 겨우 200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200만 명이면 대구 인구보다 작은 것이다. 슬로베니아 인들은 여러 슬라브 부족들 가운데 이탈리아 근처, 다시 말해 발칸의 북서쪽 끝에 살던 사람들이 다. 이들의 뿌리는 7세기에 존재했던 ‘사모 공국’이다. 다만 그 실체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의 논쟁이 있다고 한다. 이 지역은 곧장 오스트리아와 맞닿아 있다. 오스트리아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중부 유럽의 최강 국가였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와 남독일을 중심으로 네덜란드, 벨기에,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 유럽 전역에 걸쳐 통치력을 행사했었다. 오스트리아와 맞닿은 슬로베니아 역시 1382년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후 슬로베니아의 역사는 큰 변동이 없었다, 하지만 터키에서 오스만 투르크가 발흥하면서 이 지역은 합스부르크와 터키가 맞서는 전쟁터가 된다. 1683년 제2차 빈 포위에서 오스만 투르크가 패퇴할 때까지 이 전쟁은 계속되었다. 이 동안 슬로베니아 인들은 산지로 이동하여 저항하였고, 합스부르크의 통치자들은 가혹한 수탈로 백성들을 괴롭혀왔다. 오스만 투르크가 물러나고 18세기가 되면서 이 지역에도 빛이 든다. 내륙 국가였던 오스트리아는 아드리아 해와 접한 슬로베니아 지역을 무역 전진 기지로 삼았다. 1782년 농노제 폐지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경제적인 이익이 합스부르크 왕가와 연결되어 있다 보니 다른 지역에 비해 이 지역은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충성이 컸다. 하지만 이 상황을 반전시킨 것은 그 유명한 나폴레옹이었다. 나폴레옹이 온 유럽을 휘저으면서 슬로베니아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나폴레옹은 슬로베니아 일대에 ‘일리리아 속주’를 선포하고 프랑스의 속국으로 삼았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언어적 민족주의를 긍정하여, 슬로베니아어를 사용하도록 하고 각종 개혁을 단행하였다. 물론 프랑스인들이 선량하여 슬로베니아 인들을 위해 이런 개혁을 단행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들의 적이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약화시키고 분열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1815년 메테르니히(Metternich)가 이끄는 반동적인 ‘빈 체제(Vienna system)’가 출범하면서 일리리아 속주는 폐지된다. 하지만 이미 민족주의가 슬로베니아를 한 번 스쳐지나간 상태였다.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 민족 문화와 민족어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었다. 1848년에는 2월 혁명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1861년 합스부르크 왕가는 불안해진 자신들의 통치권을 떠받들어줄 새로운 동력이 필요했다. 이들은 제국의 2등 국민이었던 헝가리인들을 오스트리아와 동급으로 격상시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탄생시켰다. 이 때 슬로베니아 지역은 헝가리의 지배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헝가리인들은 이 지역을 헝가리로 동화시키는 이른바 ‘마자르화(Magyarization)’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반발작용으로 슬로베니아의 민족주의는 그치지 않았다.
크로아티아(Croatia/Hrvatska) 의 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은 바로 ‘가톨릭’이다. 샤를마뉴 대제 때부터 기독교 교구가 설정되었을 정도로 그 역사가 깊다. 같은 남슬라브계임에도 불가리아나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정체성이 달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때 이들은 독립국을 이루어 비잔틴 제국이 약화된 틈을 타 영토를 확장하기도 하였으나 12세기 무렵 헝가리의 아르파드 왕조의 지배를 받는다. 헝가리 역사학자들은 1102년 경 헝가리가 크로아티아를 병합한 것으로 주장하지만, 헝가리의 영향력 하에서도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헝가리의 지배하에 이 지역은 중세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봉건제도가 서유럽의 그것처럼 성숙해 나가게 된다. 또 이 시기가 크로아티아 문언과 문화의 출발점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크로아티아 내륙에 해당하는 이야기고,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해안가는 베네치아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크로아티아의 국토의 생김새를 보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헝가리가 약화되자 크로아티아는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았고, 슬로베니아와 마찬가지로 오스만 투르크의 침입으로 국토가 황폐화되기도 했다. 18, 19세기 민족주의는 크로아티아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 시기가 되면서 크로아티아인들은 자신들의 고대 선주민인 ‘일리리아인’의 후손이라는 의식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일리리아주의(Illyrian movement)’이다. 이들은 쉬토 방언을 기준으로 하는 공통 표준어를 확립하고, 라틴 알파벳을 통한 철자법을 제정한다. 1835년에는 크로아티아어(일리리아어)로 된 신문도 발간된다. 자신들의 일리리아어를 러시아어, 체코슬로바키아어, 폴란드어와 함께 4대 슬라브어로 생각하기도 했다. 크로아티아 지역은 합스부르크로부터 자치권을 어느정도 얻고 있었고, 크로아티아어를 표준어로 승격시키기에 이른다. 하지만 헝가리인들의 영향력은 그대로여서 중앙 정부는 헝가리어를 공식 언어로 채택하고자 하였다. 크로아티아인들은 헝가리를 견제하면서 빈에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에게 자치권을 얻고자 하였다. 그 노력은 처음에는 성공으로 돌아갔으나, 헝가리와 함께하는 이중제국이 탄생하면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결국 세력이 보다 컸던 헝가리 편을 들어준 것이다. 이에 맞서 크로아티아인들은 이웃한 세르비아인들과 연합을 모색했다. 세르비아-크로아티아의 연합 정당이 부상했다. 헝가리인들은 이 두 민족을 분열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세르비아인들만 탄압했다.
보스니아(Bosnia/Bosna/Боснa)는 앞의 두 나라와 상황이 매우 다르다. 앞의 두 지역이 모두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았던 반면, 이 지역은 일찍이 14세기부터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고 상당 부분 이슬람화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전부가 무슬림이 된 것은 아니었고 세르비아 정교와 가톨릭을 유지하는 소수의 세르비아인들도 있었다. 따라서 18, 19세기 민족주의가 유입되자 보스니아에서는 ‘민족=종교’라는 관념이 생겼다. 종교가 다르면 다른 민족이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세르비아 정교도는 자신을 ‘세르비아인’으로 가톨릭교도들은 자신을 ‘크로아티아인’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것이 보스니아에서 민족주의를 받아들인 방식이었다. 오스만 투르크의 변경에 위치하여 높은 자치권을 누리던 보스니아의 무슬림들은 1879년 베를린 조약으로 보스니아가 오스트리아의 보호령이 되면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느슨한 술탄의 지배와 오스트리아의 절대주의식 중앙집권체제는 달랐다. 술탄은 세금만 제대로 납부하면 다른 종교에 관대했고, 변경 지역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자치를 누릴 수 있었다. 새롭게 등장한 합스부르크가에 맞서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인들과 세르비아인들은 저항했다. 이 와중에 흥미로운 것은 보스니아의 무슬림들이었다. 합스부르크는 보스니아 내에서 우호세력이 필요했고, 보스니아의 무슬림들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와 구별되는 자신들의 만의 정체성을 찾아야 했다. 이를 위해 무슬림 집단과 합스부르크는 어느 정도 결속하기에 이른다. 특히 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나자 무슬림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요구받게 되면서 이것은 심화된다. 이를 등에 업고 합스부르크는 보스니아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확고히 하고자 1908년 보스니아를 완전히 합병해버리기에 이른다. 이는 이미 독립된 나라를 수립하고 있던 이웃 세르비아에게 큰 충격이었다. 세르비아 입장에서는 보스니아 역시 세르비아인의 터전이었고, 자신들이 언젠가는 정복해야 할 영토였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의 씨앗 속에서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극렬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터졌다. 그리고 이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의 전쟁을 의미했다. 더 나아가 오스트리아와 동맹관계였던 비스마르크의 독일, 세르비아의 후견국이었던 제정 러시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세계는 제 1차 세계 대전이라는 파국으로 향했다.
세르비아Serbia/Srbja/Србија는 앞선 나라들보다 더 많은 인구와 국력, 훨씬 강성한 역사를 자랑한다. 세르비아에서는 18, 19세기 경 자신들이 남슬라브 민족을 주도해야 한다는 ‘대(大) 세르비아주의(Greater Serbia)’가 발흥했다. 이것이 21세기까지 지속되어 오면서, 보스니아의 무슬림 문제와 결합해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 내전으로 이어진 것이다. 본래 세르비아 지역은 험준한 산맥으로 되어 있어, 다양한 남슬라브계 민족들이 독자적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비잔틴 제국의 세력 하에 들어가게 되면서 기독교화 된다. 독립된 대교구가 수립되었고, 종교가 이 지역에서 통합의 매개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받아들인 것은 가톨릭이 아니었다. 이들이 받아들인 것은 비잔틴 제국의 동방 정교로, ‘세르비아 정교회’가 설립된다. 이들의 황금기는 ‘세르비아 제국’ 시기였다. 비잔틴 제국이 쇠락하자 세르비아인들은 독립된 국가를 세우고 마케도니아 지역까지 아우르는 큰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최전성기는 스테판 두샨 4세(Stefan Uros IV Dusan)때이다. 하지만 1355년 그가 죽으면서 제국은 쇠락하게 된다. 이 틈을 치고 온 오스만 투르크와 세르비아는 큰 전쟁을 벌인다. 1389년 코소보에서 세르비아가 완전히 패배하면서, 세르비아는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하에 놓인다. 19세기가 되자 세르비아인들은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혁명을 통해 독립을 추진했다. 밀로쉬 오브레노비치(Miloš Obrenović), 카라조르제 페트로비치(Karadjordje Petrovic/Karađorđe Petrović)와 같은 민족운동자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서로 협력하기도 하고 대립하기도 하며 세르비아 왕국을 탄생시켰다. 여기에는 세르비아인들의 혁명과 봉기도 중요했지만, 러시아의 도움이 컸다. 이들은 처음에는 자치국에 불과했으며 1878년이 돼서야 완전한 독립국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시기가 바로 ‘대 세르비아주의’가 성숙한 시기이다. 세르비아인들은 이제 옛 세르비아 제국의 영토는 물론이고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까지 아우르는 슬라브족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런 사상은 1908년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를 완전히 합병하자 더욱 거세졌다.
2.2. 발칸의 근현대사
세계 1차 대전 이후 1918년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세르비아 연합 왕국(Kingdom of Serbs, Croats and Slovenes)이 탄생했다. 그리고 1926년 ‘유고슬라비아 왕국(Kingdom of Yugoslavia)’으로 간판을 바꿔 단다. 세르비아인들의 소망대로 커다란 통일국가를 이루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 나라를 이루었음에도 그 안의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들은 격렬히 충돌했다. 그 갈등은 유혈사태로까지 번져, 세르비아계 국왕이 크로아티아 테러리스트에 의해 암살되어, 11살의 왕자가 국왕으로 즉위할 정도였다. 이런 혼란한 상황 속에 발칸반도는 또다시 전쟁의 늪에 빠진다.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세계 2차 대전 중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추축국에 의해 쑥대밭이 되었고, 그 와중에도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는 서로 나뉘어 싸우고 학살했다. 특히 크로아티아계는 세르비아계에게 내주었던 주도권을 뺏어오기 위해 나치 독일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 결과 크로아티아의 반(反) 세르비아 민병대인 우스타샤(Ustashe/Ustaša) 주도로 세르비아계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나치 협력의 대가로 크로아티아는 ‘크로아티아 독립국(Independent State of Croatia/Nezavisna Država Hrvatska)’이라는 괴뢰국가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에서 분리되었다. 발칸반도 통합의 1차 실패였다.
발칸반도 통일의 꿈은 세계 2차대전이 끝나고 수립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Socialist Federal Republic of Yugoslavia)’으로 부활한다. 발칸 통일을 꿈 꾼 사람은 세르비아인이 아닌, 크로아티아 빨치산 출신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였다. 티토는 반 나치 운동 경력으로 전 국민에게 폭넓은 지지를 얻었고, 연합국의 신임도 얻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의 집권을 반대하지 않았다. 그렇게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때의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1234567의 나라라고 불리기도 했다.
1개의 연방국가,
2개의 문자 (로마자와 키릴 문자),
3개의 종교 (로마 가톨릭교, 그리스 정교, 이슬람교),
4개의 언어 (세르보-크로아티아어, 슬로베니아어, 마케도니아어, 알바니아어),
5개의 민족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마케도니아인, 알바니아인) ,
6개의 연방 구성국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 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7개의 접경국가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그리스, 알바니아)
집권 이후 티토는 사회주의를 채택하면서 소련과 거리를 두는 독자노선과 실용주의 외교노선을 표방하여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하나 된 연방을 표방하였다. 그는 세르비아계가 아닌 크로아티아계였기 때문에 세르비아계의 견제를 받기는 했지만 특유의 카리스마로 극복해 나갔다. 그는 민족들을 다른 민족의 거주지로 이주시켜 민족 통합을 도모했고 이렇게 연방이 유지되면 각 민족의 정체성은 소멸하고 ‘유고슬라비아 민족’이 탄생할 것으로 믿었다. 정치적으로 민족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를 이을 후계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1980년 티토 사후 연방은 각 공화국의 대통령이 돌아가면서 대통령을 맡는 방법을 택했지만, 가장 힘이 강했던 세르비아계의 입김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대(大) 세르비아주의가 부활한 것이다. 그 중심에는 1987년 세르비아의 대통령이 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šević)가 있었다.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내의 자치 지역이었던 보이보디나(Vojvodina)와 코소보(Kosovo)의 자치권을 박탈하고 헌법을 개정하는 등, 세르비아의 세력을 급속히 키워 나갔다. 1989년 동구권이 차례로 붕괴되자,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사회개혁의 추세에 맞추어 1당 독재체제를 종식시기키 위한 전당대회를 개최한다. 여기서 밀로셰비치를 포함한 각 연방 구성국의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민족의 독립을 요구했다.
1991년 6월 25일, 6개의 연방 구성국 가운데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면서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발발한다. 이탈리아와 인접해있고, 상대적으로 경제가 안정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세르비아 주도의 연방에서는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세르비아 중심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과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공화국군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 와중에 9월이 되자 마케도니아가 탈퇴, 연방은 분을 넘어서 해체 수순으로 접어든다. 상대적으로 명분이 약했던 슬로베니아와는 10일 만에 휴전에 협의한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와의 전쟁에 집중했다. 초반 열악한 무기로 싸워야 했던 크로아티아군의 전사자 수가 훨씬 많았던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크로아티아의 많은 관광지가 이 때 폭격으로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전쟁은 4년을 끌었다.
이어 이듬해인 1992년 2월에는 보스니아가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이것으로 보스니아 내전이 발발했다. 보스니아는 크로아티아와 상황이 많이 달랐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곳은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그리고 보스니아 무슬림들이 얽히고설켜 있는 지역이었다.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계의 연방 탈퇴에 맞서 세르비아계는 스르프스카 공화국(Republic of Srpska)을 선포하고 저항했다. 세르비아는 직접 개입보다 현지 민병대나 현지 정부군(유고슬라비아군)을 활용했다. 처음에 크로아티아계와 보스니아계는 서로 간에 협조였으나, 크로아티아계가 보스니아 전역의 점령을 목표로 보스니아계에 전쟁을 선포하여 보스니아에서는 세 민족이 혈투를 벌이는 극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보스니아 지역 내에서 크로아티아계의 ‘헤르체그보스니아 크로아티아인 공화국(Croatian Republic of Herzeg-Bosnia)’과 보스니아 간의 전쟁을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Croat-Bosniak War)이라고 부른다. 전쟁 속의 전쟁이었던 이 전쟁은 1994년 워싱턴 협정을 통해 끝이 난다. 이 때문에 크로아티아의 독립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인 프라뇨 투지만(Franjo Tuđman)역시 전범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쟁 초기는 세르비아 중앙의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계의 우세였다. 크로아티아계는 본국 역시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보스니아계 무슬림들이었다. 그들은 이 틈바구니 속에서 ‘인종 청소(ethnic cleansing/etničko čišćenje)’라고 불리는 대량 학살을 당한다. 1995년이 돼서야 UN과 NATO가 개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세르비아 민병대는 UN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대량 학살과 강간을 저질렀다. 이런 학살은 세르비아계의 비율이 높았던 동쪽 지역에서 대량으로 발생했으나, 수도 사라예보도 예외가 아니었다. 가장 끔찍한 참상은 스레브레니차 대학살(Srebrenica massacre)로, 8,000명 이상의 보스니아계 남성이 학살당했다. 결국 데이턴 협정에 따라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는 독립하되 그 내에서 세르비아계의 자치권을 보장되었다. 또한 대통령은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계, 세르비아계가 윤번으로 8개월씩 맡기로 하였다. 1993년 UN 산하로 설립된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 형사 재판소(ICTY;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는 전쟁이 마무리되자 본격적인 활동을 벌였고, 2008년까지도 전범들을 기소했다. 세르비아는 유일하게 남은 연방국인 몬테네그로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다시 세운다.(이른바 신유고 연방)
하지만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비극은 1998년 세르비아가 남쪽의 코소보를 침공하면서 다시 이어졌다.(코소보 전쟁(Kosovo War)) 코소보에는 오스만 투르크 시절 이주한 알바니아계 무슬림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르비아인들은 외세에 맞서 싸웠던 성지와도 같은 이곳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보스니아의 참상이 반복될까 우려했다. 나토군의 폭격과 지상군 개입 끝에 전쟁은 마무리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미군의 F-117 스텔스기가 세르비아의 대공망에 격추되면서 큰 망신을 당했다. 또 베오그라드의 중국 대사관을 오폭(誤爆)하여 중국인 사망자가 발생, 미중간의 외교분쟁을 낳기도 했다. 전쟁사적으로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공군만으로 전황을 뒤집었다는 의의가 있는 동시에 공군기의 폭격의 한계를 알려준 전쟁이기도 하다.
코소보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2000년, 부정선거 시비로 밀로셰비치가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극렬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세르비아를 부강하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경제 파탄과 전쟁을 낳았다는 생각이 세르비아인들 사이에서 들었던 것이다. 2003년이 되자 유고 연방은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연방으로 개칭하고 이와 함께 몬테네그로에 고도의 자치권을 보장해 주었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마저 사라지게 된다. 그럼에도 몬테네그로는 갈라서기를 선택했고, 2006년 연방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라는 두 개의 나라로 분리되었다. 이어 2008년 세르비아 내 코소보가 독립을 선언하였다.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등 서방의 선진국은 코소보를 승인하였으나 러시아, 중국 등 세계 대다수의 나라는 아직 코소보를 승인하지 않고 있다. 1991년부터 2008년까지 일어난 이런 정치적 분열 양상을 가리켜 ‘발칸화(Balkanization)’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3. 결론: 세르비아는 왜 프로이센이 되지 못했는가?
19세기 중유럽에서 프로이센(Prussia/Preußen)과 사르데냐-피에몬테(Sardinia-Piedmont/Sardegna-Piemonte)가 각각 독일과 이탈리아를 통일했다. 하지만 반대로 세르비아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에서도,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도 발칸반도를 통일할 수 없었다. 분명 발칸의 여러 민족 중에 가장 화려했던 역사, 많은 인구를 자랑하는 세르비아인들은 발칸의 통일을 주도해나갈 자격이 있었다. 게다가 세계 1차 대전 직후 각 민족들은 물론 외부의 열강들도 통일된 왕국을 승인했다. 하지만 어째서 세르비아는 발칸의 프로이센이 되지 못했는가?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분석된다. 먼저 발칸반도의 여러 민족이 겪은 역사가 너무나도 상이하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합스부르크의 왕가의 지배를 받았던 반면, 보스니아와 세르비아는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단 한번도 통일된 정치 체제 하에 놓여본 적이 없던 것이다. 험준한 산맥(디나르알프스 산맥)이 지나는 특성상, 합스부르크 지역과 오스만 투르크 지역 간의 교류도 희박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각자 다음으로 종교정체성이 달랐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보스니아의 무슬림은 제외하고서라도, 세르비아 정교와 가톨릭이라는 상이한 두 종교는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이라는 정체성 사이에 큰 강을 만들어준다. 또한 통일된 언어 제정도 실패했다. 세르비아어와 크로아티아어를 통합하여 세르보-크로아티아어를 유고슬라비아의 공용어로 제정하였으나, 그 상이함 때문에 결국 세르비아어와 크로아티아어로 나뉘고 말았다. 크로아티아어는 로마자, 세르비아어는 키릴 문자로 표기한다. 게다가 마케도니아어는 불가리아어의 방언으로 취급될 정도로 불가리아어에 가까우며, 코소보에서 쓰이는 알바니아어는 아예 독립된 어군을 형성할 정도로 상이한 언어이다. 그리고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 자체가 사라진 현재, 몬테네그로는 자신의 언어를 세르비아어와는 다른 ‘몬테네그로어’로 칭하며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세르비아가 통일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상이한 민족주의였다. 그리고 이 요인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역사적 배경, 종교 정체성, 통일된 언어와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민족주의를 구성하는 요소가 바로 이런 것들이기 때문이다.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인 대 세르비아주의는 자신들이 발칸 남슬라브 족들의 우두머리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나름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자신들만의 민족주의를 발흥시킨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세르비아인들과 종교와 역사적 배경이 완전히 다른 보스니아의 무슬림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렇게 민족주의가 통합되지 않고 분열된 채 충돌하면서 역사의 비극이 계속되었다. 이 문제는 세계 1차 대전의 발발에서부터 21세기 코소보 전쟁까지 이어져 왔다. 흔히들 발칸 반도를 ‘유럽의 화약고’라고 칭한다. 결론적으로 민족주의가 이 화약고를 만들어낸 것이다.
2015.08.11. 처음 씀
2016.01.12. 고쳐 씀
<참고 문헌>
김철민(2010), 『발칸유럽 민족문제에 대한 이해 : 민족 기원과 민족주의』, 한국외국어대학교 출판부
<참고 웹사이트>
나무위키(namu.wiki): ‘마케도니아어’, ‘보스니아 내전’, ‘세르비아/역사’, ‘알바니아어’, ‘요시프 브로즈 티토’, ‘우스타샤’, ‘유고슬라비아’, ‘유고슬라비아 내전’, ‘코소보 전쟁’, ‘크로아티아/역사’ 항목
한국어 위키백과(ko.wikipedia.org): ‘유고슬라비아 전쟁’,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 ‘코소보 전쟁’ 항목
영어 위키백과(en.wikipedia.org): ‘Illyrian Movement’, ‘NATO bombing of Yugoslavia’ 항목